"불편해도 배우고 싶어요" 페미니즘 도서 열풍

2016-08-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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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위키트리 "솔직히 책을 읽을수록 불편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더 많이 읽고 배워야겠다는

이하 위키트리

"솔직히 책을 읽을수록 불편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더 많이 읽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19일 오전 11시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H 17' 코너에서 만난 대학생 손정아(여・23) 씨는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H 17'에는 원래 '법학일반・사회일반'으로 분류된 책들이 진열돼 왔지만, 최근 들어 여성에 대한 책들이 이 코너를 점령하고 있다.

손 씨는 "지금까지 읽은 페미니즘 서적은 두 권밖에 되지 않는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쁜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 입문서로 괜찮다는 입소문이 나서 이 책을 골랐다"고 말했다.

손정아 씨는 "솔직히 페미니즘 책을 읽을수록 불편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불편함이 싫지 않다. 더 많이 읽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광화문 교보문고 'H17' 코너를 찾은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그중 8명이 여성이었으며, 이 여성들은 모두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거나 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교보문고에 왔다는 직장인 김모(여・32)씨는 페미니즘 도서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프랑스 만화 '악어 프로젝트'를 골랐다. 김 씨는 "책을 살펴 보니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내용도 있어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악어프로젝트'는 프랑스 만화가 토마 마티가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그려낸 그래픽 북이다.

법학 도서를 찾으러 'H17' 코너를 찾았다는 한 중년 남성은 "오랜만에 서점에 왔다가 '나쁜 페미니스트', '이기적 섹스' 같이 자극적인 제목이 많아 깜짝 놀랐다"고 했다.

2위 '나쁜 페미니스트', 4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6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8위 '페미니즘의 도전'

같은 날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권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 4권이나 올라와 있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관계자는 "주로 여성들이 페미니즘 도서를 찾는다.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대학생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도서 열풍은 온라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온라인 서점 'YES 24'에 따르면 여성학 도서 판매 증가율은 2011년~2014년 마이너스를 이어가다 2015년 8.8% 약간 증가했다. 하지만 2016년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113.8% 증가해 폭발적인 판매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알라딘 박태근 인문 MD는 "2016년이 아직 다섯 달이나 남았는데 이미 작년보다 1.5배나 많은 페미니즘 책이 팔렸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도서 열풍 중심에는 젊은 여성들이 있다. 'YES 24'에 따르면, 여성학 책을 산 사람 중 10대 여성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2.4%, 20대 여성은 404.9% 각각 증가했다. 거의 네 배씩 증가한 셈이다. 박태근 MD도 "2014년만 해도 여성학 분야 도서 구매자 중 40대가(37.4%)가 가장 많았는데 올해는 20대가(47.2%) 압도적으로 많다"고 했다.

젊은 여성들은 왜 페미니즘 도서를 읽게 됐을까? 인스타그램에 페미니즘 책 사진을 올린 여성 10명과 대화를 나눴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시위하는 여성들 / 뉴스1

'페미니즘 도서를 읽게 된 계기'로 '강남역 살인사건'을 꼽은 여성은 10명 중 7명이었다. 한 인스타그램 이용자(여・21)는 "전에는 페미니즘 도서를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강남역에서 무고한 여성이 살해당하면서 여성 혐오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해당 이용자는 "공부를 하다 보니 여성인 나조차도 여성 혐오가 내재돼 있고 학습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모습을 고치고 싶어서 페미니즘 책을 읽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인스타그램 이용자(여・22) 역시 "SNS로 사회에 퍼진 여성 혐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중요한 이슈가 됐다"고 말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페미니즘 도서 열풍은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관계가 있다. 작년에 메갈리아가 등장하고 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여성 혐오, 성차별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여성들이 그 궁금증에 답을 해줄 수 있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며 "대학 내에서도 학부생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스터디를 꾸리고, 페미니즘 도서들을 함께 읽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론서' 위주였던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대중서'로 발간되고 있다는 점도 페미니즘 도서 열풍 요인으로 꼽힌다.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 인스타그램 이용자 이 모 씨(여・27)는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시작으로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 책 자체가 제한적이고 대부분 학술 서적이라 엄두를 내기 어려웠는데 최근 종류가 다양해지고 대중적인 페미니즘 책들도 발간되면서 더 쉽게 페미니즘을 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기초 회화 입문서'라는 콘셉트로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쓴 저자 이민경 씨는 "좋은 이론서가 많지만 이론서를 많이 읽어도 입을 떼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여성 혐오, 성희롱 등과 마주했을 때 즉석에서 대꾸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전에서 쓸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태근 알라딘 MD는 "작년에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페미니즘 도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전에도 고전 스테디셀러가 있긴 했지만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것은 이때부터"라고 설명했다.

박 MD는 "최근 발간되고 있는 페미니즘 책들을 두고 '읽고 쉽다'고 하는 것은 이 책들이 공감도 높은 이야기를 개념화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나쁜 페미니스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등은 모두 일상에서 겪는 사례를 다뤘기 때문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이나영 교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론이나 조직적인 여성운동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기가 느끼는 부당함을 '언어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여기서 '언어'는 논리다. 젊은 여성들이 논리를 세우기 위해 실제 일상과 관련된 책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pixabay

"페미니즘 책을 읽은 후 불편한 일들이 더 많아졌다"고 답한 인스타그램 이용자는 10명 중 10명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더 불편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한 인스타그램 이용자(여・21)는 "이전에는 성차별적인 농담을 들으면 기분이 나빴지만 웃어넘겼다. 그러나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난 후부터는 '프로불편러'가 된 것 같다. 여성 혐오적인 시각, 언행, 사회 현상들이 전부 불편해졌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인스타그램 이용자(여・38)는 "모르고 있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불편해졌지만 이 '불편함'이 내 삶, 내 생활, 내 태도를 많이 바뀌게 했다. 두 딸에게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주고 싶어 더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나영 교수는 "일상 속 부당함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을 보는 다른 시각을 키운 것이기 때문에 이제 돌아갈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페미니즘 책을 통해 여성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편견들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자기 삶이 변한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히 세상이 변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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